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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国語)孔子堂跡

2025年03月05日

공자당 터(孔子堂跡)

 공자당은 중국의 철학자인 공자를 모신 사당으로, 기쿠치의 문화가 크게 융성했던 시대에는 유학과 불교 학문뿐만 아니라 전반적인 지적 탐구를 하는 거점이 되었습니다.


 공자당은 1472년에 기쿠치 가문 영주인 시게토모(1449-1493)가 세웠습니다. 시게토모는 선대인 아버지 다메쿠니(1430-1488)와 마찬가지로 무사와 주민을 위한 교육과 지역 문화의 지원에 힘을 쏟았습니다. 그 결과 기쿠치 가문은 문화의 전성시대를 맞이했고, 시가와 다도 등 여가 활동이 꽃을 피웠습니다.


 그 흐름의 중심에 있던 것이 공자당입니다. 절과 비슷한 여러 건물로 이루어진 이곳은 기쿠치 일족에게 학문의 장이 되었고, 멀리 있는 교토에서도 학자들이 찾아와서 강의나 토론을 진행했습니다. 선종과 중국 고전의 권위자로 중국 명나라 궁정에 수년간 유학한 승려 게이안 겐주(1427-1508)도 이 중 한 명입니다.


 사당 내에는 공자와 그 제자들의 조각상이 안치되었고, 이곳은 공자를 모시는 의식에도 사용되었습니다. 공자당은 1500년대 중반에 기쿠치 가문이 멸망했을 때 해체되었습니다. 하지만 이후 이어진 에도 시대(1603-1867)에 번교(에도 시대에 각 번이 제후에 속하는 무사의 자제를 위해 마련한 학교)가 세워질 때 공자당은 건축 자재로 재이용되었고, 공자와 제자들의 조각상은 다시 제단에 모셔졌다고 전해집니다.


기쿠치 일족(菊池一族とは)

다른 문화재에 설명판도 다국어화 되어 있습니다.(他の文化財説明板も多言語化しています。)


孔子堂跡

 高野瀬の旧老人福祉センター内に、「孔子堂址」の石碑があります。県道竜門線開設工事により現在地に移転されたものですが、この碑には「文明4年(1472)21代重朝が家臣隈部忠直と相談し、菊池の文教奨励のため創建した・・・」と書かれています。

 この堂に孔子の画像と十哲の像を祭り、家臣を集めて儒学を講じ、春秋に釈奠の礼を行ったと伝えられています。文明9年(1477)には京都南禅寺の高僧桂庵禅師を招いて釈奠の礼を行っていますが、その時禅師は「一家有政九州化 万古斯文四海同、絃誦未終花欲暮 香烟撲袂画屏風(肥の国たるや、文有り武有り、民は礼節を知る。実に邦君の仁化の及ぶ所なり。)」と重朝の徳を称えたといわれています。

 江戸時代になって孔子堂は、細川藩による藩学時習館建設の資材に、孔子像・十哲の像は祭壇に活用されたともいわれ、重朝の菩提寺である玉祥寺には、細川氏より贈られた「真済」と書かれた木額が残されていま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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