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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国語)菊池一族とは

2025年03月05日

기쿠치 일족

 기쿠치 일족은 일본 중세 시대에 규슈에서 중요한 정치적 역할을 한 세력이 강한 무사 집단입니다. 한때는 일본 전국의 정치에 영향을 미칠 정도로 엄청난 세력을 자랑했습니다. 일족의 본거지이자 성을 중심으로 형성된 도시인 와이후(현재 기쿠치시 중심부)에는 기쿠치 가문이 적대시하는 무장에 의해 멸망한 후, 수 세기에 걸친 지금도 500년에 이르는 역사 유산이 짙게 남아 있습니다.

기쿠치 가문은 어디에서 왔는가?

기쿠치 일족이 언제, 어떻게 성립되었는지 자세한 내용 대부분은 역사 속에서 사라져 버렸지만, 1070년에 성립된 것으로 짐작됩니다. 이 해에 규슈의 행정 중심지였던 다자이후(현재 후쿠오카현 중서부)에 부임했던 고위 관리, 노리타카가 현재의 기쿠치 지방에 도착한 것으로 짐작됩니다. 노리타카는 기쿠치라는 성을 사용했고, 이후 기쿠치 강이 되는 강가에 저택을 짓고, 성을 중심으로 형성된 도시인 와이후의 기반을 닦았습니다.


 외딴곳이었지만 기쿠치 지방은 벼농사가 왕성한 농업 지대였습니다. 노리타카와 그 자손들은 기쿠치 강에서 이뤄지는 교역을 독점했고, 주변의 평야에서 재배한 작물을 판매하여 부를 얻었습니다. 이러한 평야는 기쿠치 일족이 일본에서 손꼽히는 농지로 발전시켰습니다.

인정받지 못하는 입장

 노리타카의 시대에서 약 100년 후인 12세기 후반, 기쿠치 가문은 일본 역사의 새로운 시대를 여는 전쟁에 휘말립니다. 겐페이 전투(1180-1185)에서는 오랫동안 조정에서 패권을 다퉈온 무가인 헤이 가문과 미나모토 가문이 천하의 지배권을 둘러싸고 싸웠습니다. 일본 전국의 무가는 한쪽에 붙을 수밖에 없었기에 기쿠치 가문은 처음에 미나모토 가문을 지지했으나, 싸움의 최종 단계에서는 주로 규슈의 무사로 구성되어 곤경에 처해 있던 헤이 가문 군대와 동맹을 맺었습니다.


 겐페이 전투에서는 미나모토 가문이 승리했으며, 미나모토 가문은 이후 일본 최초의 무가 정권인 가마쿠라 막부를 설립했습니다. 가마쿠라 막부는 동일본에 근거지를 뒀으며, 같은 지역의 세력을 등에 업고 옛날에 적이었던 기쿠치 가문을 비롯한 규슈의 여러 가문을 의심의 눈초리로 보았습니다.


 기쿠치 가문과 막부 사이의 불신이 길어져 13세기 후반에는 더욱 나빠졌습니다. 조선을 정복한 몽골 황제 쿠빌라이 칸은 1274년과 1281년에 일본에 침공하기 시작했습니다. 일본의 무사들은 침략자를 격퇴하기 위해 파벌을 향한 충성심을 버리고 싸웠습니다. 기쿠치 가문도 막부를 위해 여러 번에 걸쳐 싸워 몽골군을 내쫓는 데 공헌했습니다. 당시 영주였던 기쿠치 다케후사(1245-1285)는 전장에서 보여준 용맹한 모습으로 칭송받았습니다. 하지만 침략자에게 승리한 후 기쿠치 일족은 막부가 포상품으로 자신들에게 보답하지 않은 것에 불만을 품었습니다.

각광을 받다

 14세기 초, 가마쿠라 막부의 지배력은 약해져 갑니다. 막부는 외부의 적으로부터 일본을 지키기 위해 자원을 소비하는 한편, 지방의 무사와 조정을 통제하기 어려운 상황에 직면해 있었습니다. 특히 조정과의 대립은 가장 큰 고난이 되어 닥쳐왔습니다. 고다이고 천황(1288-1339)이 조정에서 권력을 되찾을 기회를 노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고다이고 천황은 기쿠치 가문을 포함하여 막부에 불만을 지닌 무가와 동맹을 맺어, 1331년에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1333년, 기쿠치 가문은 다른 규슈의 무사단과 함께 막부의 지부가 있는 하카타(현재 후쿠오카현 후쿠오카시)를 공격했습니다. 하지만 공격하려던 그때, 기쿠치 일족은 동맹을 맺은 무사에게 배신당합니다. 대군을 이끄는 적에 비해 아군이 적어 죽음을 각오한 영주 기쿠치 다케토키(1292-1333)는 아들 다케시게(1307-1341)에게 기쿠치로 돌아가도록 명했고, 막부군에게 죽을 각오로 돌격했습니다.


 다케토키와 그 부하들은 전사했지만 그들의 대의는 승리했습니다. 기쿠치 일족의 하카타 침공이 실패하고, 불과 몇 개월 후, 가마쿠라 막부는 고다이고 천황 측의 군대에 의해 멸망하여 막부의 시대는 끝이 났습니다. 승리한 천황은 기쿠치 가문의 충성심에 보답하기 위해 다케시게를 히고국(현재 구마모토현) 수호(지역의 치안을 유지하는 지방관. 현재 현의 지사와 같은 것)로 임명했습니다. 기쿠치 가문은 이 명예 있는 직책을 약 200년간 맡았습니다.

남조의 충신들

 고다이고 천황이 조정의 직접 통치를 부활시키려고 들인 노력은 오래 이어지지 않았습니다. 고다이고 천황의 개혁은 가마쿠라 시대 이전의 귀족 사회와 정치 체제로 회귀하는 것이 목표였으나, 해당 정책으로 무사 계급의 대부분을 적으로 돌리게 되었습니다. 가마쿠라 막부가 무너진 후 불과 3년 후인 1336년, 옛날 가마쿠라 막부의 무장이자 고다이고 천황의 전우였던 아시카가 다카우지(1305-1358)가 교토를 점령했고, 새로운 무가 정관인 아시카가 막부를 창설했습니다.


 다카우지는 자기 뜻대로 새로운 천황인 고묘 천황을 세웠고, 고다이고 천황은 수도에서 도망쳐 교토의 남쪽, 현재 나라와 가까운 요시노에서 대립하는 조정을 만들었습니다. 이 사건으로 남북조 시대(아시카가 다카우지 측이 북조, 고다이고 천황이 남조)가 시작되었으며, 대립하는 두 조정이 국가의 지배권을 둘러싸고 싸우게 되었습니다.


 기쿠치 가문은 규슈의 다른 많은 무가와 마찬가지로 남조에 충성을 맹세했습니다. 고다이고 천황은 규슈의 지지자를 전국을 탈환할 수 있는 열쇠로 여기고, 어린 황태자 가네나가 친왕(懐良, ‘가네요시’라고도 읽음; 1329-1383)을 규슈에 파견했습니다. 파견의 목적은 기존 동맹 관계를 강화하고 새로운 동맹 관계를 구축하는 데 있었습니다.


 가네나가는 1348년에 와이후에 도착하여 성주인 기쿠치 다케미쓰(1319-1373)와 대면했습니다. 이 만남이 기쿠치 가문 최대 번영기의 시작이 되었습니다. 그 후 10년간 가네나가와 다케미쓰는 규슈에 거점을 둔 무가와 강력한 동맹 관계를 구축하여 규슈 전역에서 북조파를 물리쳤습니다. 그들의 승리는 유명한 지쿠고 강 전투(1359년)에서 정점에 달했고, 기쿠치 가문은 북조 측의 대군을 결정적으로 무찔렀습니다. 이듬해 말까지 기쿠치 가문이 거느리는 남조 측 지지자는 규슈 전역을 지배하게 되었고, 동맹 본부는 다자이후로 옮겨졌습니다. 300년 정도 전에 기쿠치 가문의 창설자인 노리타카가 기쿠치(구마모토현)로 여행을 떠나기 전 부임한 곳으로 다시 돌아가게 된 것입니다.

 전투에서 승리한 후 기쿠치 일족은 방어를 공고히 했으나, 남조의 요청이 재앙을 초래하게 됩니다. 이는 승리한 규슈의 무사에게 요시노를 방문하도록 명한 것이었습니다. 기쿠치 다케미쓰가 이끄는 함대는 규슈에서 출범했으나, 북조군에게 요격당하여 퇴각했습니다. 다케미쓰는 다자이후로 돌아갔지만 아시카가 막부는 규슈의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 전략가로 유명한 이마가와 료슌(1326-1420)을 새로운 장군으로 파견했습니다.


 료슌은 1372년에 기쿠치 가문이 이끄는 남조군을 다자이후에서 추방했으며, 이듬해 다케미쓰의 죽음은 기쿠치 가문에게 더욱 타격을 주었습니다. 최강의 장군을 잃은 가네나가공이 이끄는 남조군은 규슈의 후미진 곳까지 몰렸습니다. 1383년에 가네나가가 사망한 후 남조 측의 저항은 끝났으며, 기쿠치 가문은 다시 선조의 땅인 와이후 주변에 틀어박히게 되었습니다.

 정치에서 눈을 돌려 문화 진흥을 이룩하다

 1392년, 고전을 면치 못하던 남조 측은 패배를 맛보았습니다. 승리를 확신한 아시카가 막부는 약해진 기쿠치 가문에 계속해서 히고국의 수호직을 맡겼으나, 일족의 정복과 영광의 시대는 끝을 맞이했습니다.


 이후 와이후 성주인 기쿠치 가문은 막부와의 관계를 회복하고, 한때는 일족의 영주가 히고국과 인접한 지쿠고국(현재 후쿠오카현 남부)의 수호로 임명될 정도로 막부의 호감을 얻었습니다. 하지만 기쿠치 일족은 정치적 야심보다 문화의 발전에 주목했습니다. 20대 영주인 기쿠치 다메쿠니(1430-1488)와 아들인 시게토모(1449-1493)는 무사와 주민의 교육 기회를 확대하고, 그들이 지적·정신적인 부분을 탐구하도록 장려했습니다. 그들의 지도하에 기쿠치는 불교와 유교 학문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쇠퇴와 몰락

 기쿠치 일족의 평화적 탐구는 일본 국내가 무사단의 대립으로 내란 상태에 빠지면서 뒤바뀌게 되었습니다. 15세기 후반에 아시카가 막부는 지방의 무장을 중심으로 한 세력이 대두하면서 약해졌고, 지배력을 잃고 있었습니다. 소규모지만 같은 움직임이 기쿠치에서도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오랫동안 기쿠치 가문을 섬겨 온 가신 일족이 주인을 쫓아내고 영주의 자리를 빼앗으려고 시도한 것입니다.

 

 1504년, 해당 무사들은 기쿠치 가문의 영주를 없애고, 가로(가로란 다이묘<넓은 영지를 소유한 무사>를 섬기는 중신) 중 한 명을 영주로 임명했습니다. 1500년대 중반에 기쿠치 가문은 남은 영토 라이벌인 오토모 가문에게 빼앗깁니다. 그리고 1554년 마지막 영주였던 기쿠치 요시타케가 세상을 떠난 후 기쿠치 가문의 가계는 소멸했습니다.

재평가

 1800년대에 들어 현지의 역사와 과거의 영광을 향한 관심이 높아져 기쿠치 일족이 다시 주목받게 되었습니다. 상인과 영주 등 기쿠치에 사는 유복한 사람들이 일족과 관련이 있는 비석과 묘를 복원하고, 재건하기 위한 자금을 제공했습니다.

 일본 전국 규모로 기쿠치 일족의 공적이 재평가 받게 된 것은 1868년 메이지 유신 이후였습니다. 메이지 유신을 통해 천황이 정치적 지배권을 되찾았고, 약 7세기에 걸친 무가의 지배가 끝났습니다. 메이지 천황(1852-1912)의 신정부는 14세기 남조의 천황이 천황의 지위를 정당하게 지킨 자라고 판단하였고, 남조와 동맹을 맺은 핵심 세력인 기쿠치 일족은 새로운 체재에서 기대하는 군주를 향한 충성심의 본보기로 다뤄졌습니다. 기쿠치 가문의 주요 영주들(12대 기쿠치 다케토키, 13대 다케시게, 15대 다케미쓰)은 와이후의 일족이 거주하던 성의 터에 새롭게 세워진 기쿠치 신사의 제신으로 모셔졌습니다.


菊池一族とは

 菊池一族は今から1,000年ほど前の平安時代後期から室町時代にかけ、500年にわたって現在の菊池市を中心に活躍した武士の一族です。

 菊池氏の始まりには諸説ありますが、延久2年(1070年)初代則隆が深川に館(北宮館)を構え、菊池を名乗ったことに始まるといわれています。

 則隆やその子孫は菊池川を利用した海外貿易で財を成し、一族を繁栄へ導きました。令和元年に行われた遺跡の確認調査では、交易に用いられたと考えられる船着場跡が見つかっています。

 源平合戦(1180-1185)の頃、6代隆直の代になると、菊池氏は肥後国最大の勢力を持つようになります。隆直は九州を勢力下に置こうする平氏と敵対し、実質的な肥後国司として近隣の豪族を糾合して平氏に対抗しました(養和の内乱)。しかし最後には降伏し、平家方となった後、壇ノ浦の戦いで討取られました。

 鎌倉幕府が開かれると、源氏と敵対していた菊池氏も御家人として幕府と関りを持つようになります。得宗権力(執権北条氏)と結びついた菊池氏は肥後国の御家人を統率し、九州における地位も高かったと考えられます。蒙古襲来(1274年文永の役・1281年弘安の役)では10代武房が活躍し、蒙古襲来絵詞にもその姿を見ることができます。

 鎌倉時代の末期に幕府の支配力が弱まると、天皇による政治の復活を望んだ後醍醐天皇の働きかけにより、菊池氏は九州の他の有力御家人とともに幕府打倒の兵をあげます。

 元弘3年(1333年)、12代武時は博多(現在の福岡)にあった幕府の出先機関「鎮西探題」の襲撃を計画し、少弐氏・大友氏とともに討ち入りますが、土壇場で幕府側へ寝返った少弐氏・大友氏によって窮地に追い込まれます。袖ヶ浦で反撃の態勢を整える武時は嫡男武重を呼び寄せて菊池へ帰るように命じると(袖ヶ浦の別れ)、鎮西探題へ突撃し全員が討ち死にしてしまいました。その数ヶ月後鎌倉幕府は倒され、倒幕後の論功行賞により13代武重は肥後守に任じられます。これ以後菊池氏は200年あまり肥後守護の地位を守り続けました。

 後醍醐天皇による政治(建武の新政)は長く続かず、かつてともに鎌倉幕府を倒した足利尊氏が室町幕府を開き、自分の正当性を主張するためにもう一つの王朝を立てると、後醍醐天皇は奈良県の吉野に逃れました。二つの王朝が並び立つこの時代を、南北朝時代といいます。

 南北朝時代、菊池一族は一貫して南朝に味方し続けました。15代武光は後醍醐天皇が九州に派遣した懐良親王を隈府に迎え、各地で北朝方と戦いを繰り広げます。正平14年(1359年)筑後川の戦いでは、南朝軍4万騎に対し北朝軍6万騎の圧倒的に不利な状況で勝利を収め、正平16年(1361年)には大宰府を制圧します。その後博多を落とした武光は正平18年(1363年)豊後大友氏を降参させ、九州制覇を成し遂げました。

 一方、大宰府を奪われた北朝方は南朝方に対抗するため、今川了俊を九州探題に任命します。了俊は豊後大友氏、肥前松浦党、中国地方の豪族などとともに大宰府を攻撃し、文中元年(1372年)ついに大宰府は陥落してしまいました。ここで11年間に及ぶ征西府の大宰府統治は終焉を迎えます。

 武光はこの頃死去したと考えられており、征西将軍懐良親王も天授元年(1375年)に征西将軍職を甥の良成親王へと譲り、奥八女へ隠退しました。懐良親王は現在の八女市星野にある玉水山大円寺にて戦で亡くなった人々の菩提を弔いながら余生を過ごし、弘和3年(1383年)3月に55歳で亡くなったと伝わっています。

 武光の跡を継いだ16代武政もその後すぐに亡くなり、息子の武朝がわずか12歳で菊池氏17代当主の座につきました。武朝は良成親王とともに南朝の勢力を盛り返すため奮戦し、天授元年(1375年)水島の戦いでは今川勢の内紛に乗じて大勝を収め、天授4年(1378年)託麻原の戦いでも数に勝る北朝方を打ち破りました。しかし菊池一族を取り巻く情勢は次第に悪くなり、弘和元年(1381年)ついに本拠地守山城が陥落、良成親王は武朝とともに宇土城、八代、高田御所、大杣(筑後矢部)と転戦します。しかしとうとう南北朝合一まで菊池氏の本拠が回復することはありませんでした。

 元中9年(明徳3年・1392年)、南朝の後亀山天皇が北朝の後小松天皇に譲位し、南北朝合一がなされると、武朝は改めて肥後守護に任じられます。これ以後、菊池氏は16世紀初期まで肥後国守護職を保持し、隈府は肥後国の守護所として発展していきました。

 その後20代為邦の頃になると筑後所領を失うなど徐々に菊池氏の勢いに陰りが見られるようになりますが、その一方で、為邦と息子の21代重朝の代は、菊池で文教の高揚がみられる時期でもありました。為邦は重朝に代を譲った後、亀尾城下に隠棲し、日夜碧巌集の研究に励んだと伝わっており、15世紀中頃編纂された『投贈和答等諸詩小序』には、為邦の文才を褒め称える話がみられます。為邦の跡を継いだ重朝も学問を重んじ、菊池を訪れた桂庵玄樹に教えを乞うほか、文明4年(1472年)には孔子堂を建て、多くの家臣を集めて儒学の学習を行っています。また、文明13年(1481年)には一日一万句を詠む連歌の会を催し、そこで詠まれた句は「菊池万句」と呼ばれました。

 19代持朝から21代重朝の代は菊池一族内の争いが次々と起こったうえ、南北朝合一後も争いを続けていた阿蘇氏同士の争いに加担した際の敗戦などで、菊池一族の権威が衰え始めます。重朝の子、22代能運の代には相良氏との争い、宇土為光(為邦の弟)による隈府城の占拠などが起こり、永正元年(1504年)病床の能運が没すると、菊池氏正統は途絶えてしまいます。

 跡を継いだ23代政隆は20代為邦の弟為安の孫にあたり、能運の遺言によって菊池本家を相続し、肥後守護となりました。しかしこのころ九州で勢力を拡大していた大友氏の働きにより、肥後守護の地位はすぐに阿蘇惟長へ移ります。菊池家重臣84名の連判誓書により菊池家へ入った惟長は菊池武経と名を改め、復興の機を窺う政隆を退けますが、次第に菊池家家臣との仲が悪くなり、永正8年(1511年)阿蘇家へ戻ります。

 武経が菊池を去った後、菊池家の重臣達は菊池家支流の詫磨武安の子武包を迎えることとし、武包は菊池氏系統最後の肥後守護となりました。しかし菊池氏の力は衰退しきっており、大友家当主となった義鑑の弟重治によって武包は守護の座を追われ、重治が肥後守護となります。重治は菊池義宗(後に義武)と改名し当主となるも、菊池家家臣と折り合いが悪く、天文3年(1534年)八代へ逃れた果てに甥の大友義鎮(後の宗麟)に討たれ、ここで菊池氏系統は消えてしまいました。

 江戸時代1800年代になると、地元の歴史への関心が高まり、裕福な商人によって菊池氏ゆかりの碑や墓が整備されたり、学者によって菊池氏の業績が書き記されたり、菊池氏が再び脚光を浴びるようになります。明治維新を迎えると南朝に貢献した菊池氏は忠臣として高く評価されるようになり、本拠地守山城跡には菊池一族を祭神とする菊池神社が建てられまし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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