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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国語)菊池政隆の墓(菊池政隆公墓)

2025年03月05日

기쿠치 마사타카의 묘

 기쿠치 마사타카(1491-1509)의 짧은 생애를 통해 1500년대 기쿠치 가문이 약해진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마사타카의 시대까지, 일족의 무장이 이끄는 집단이 지도자에게 직접 이의를 제기할 정도로 권력과 영향력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마사타카가 13세에 영주가 된 다음 해인 1505년, 가신들은 그를 추방해 실권을 장악하고, 지역에서 영향력 있는 인물인 아소 가문의 아소 고레나가를 영주로 앉혔습니다.


 마사타카와 그에게 충성을 맹세한 자들은 성을 중심으로 형성된 도시인 와이후를 떠났고, 때를 기다렸다가 기쿠치 가문의 지휘권을 되찾기 위한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1509년, 그 시도는 실패로 끝났고 마사타카의 잔존 병사 200명은 안코쿠지 절 주변으로 퇴각했습니다. 여기서 두 사람은 다시 충돌했고, 패배한 마사타카는 안코쿠지 절에 틀어박혀 아소 고레나가의 군대가 절을 태워버리기 전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마사타카의 죽음 이후 십몇 년간 내분과 적대하는 무장의 위협으로 기쿠치 가문은 계속 약해졌습니다. 일족은 점점 영지를 잃었고 1500년대 중반에는 완전히 멸망했습니다.


 기쿠치 마사타카의 묘는 안코쿠지 절 뒤편에 있습니다. 현재 묘비는 에도 시대(1603-1867)에 만들어졌으며, 중국 신화에서 상서롭다고 여겨지는 거북이와 뱀이 조합된 龜趺(귀부)라는 생물의 형태를 한 받침대 위에 세워져 있습니다. 해당 양식은 에도 시대에 일본에서 보급한 것으로, 1700년대부터 1800년대에 걸쳐 기쿠치 영주의 묘가 재건됐을 때도 도입되었습니다.


기쿠치 일족(菊池一族とは)

다른 문화재에 설명판도 다국어화 되어 있습니다.(他の文化財説明板も多言語化しています。)


菊池政隆の墓(菊池政隆公墓)

 菊池氏23代政隆の墓は、久米安国寺の裏手に所在します。

 永正元年(1504)菊池政隆は、先代能運の遺命により菊池宗家を相続しました。しかし翌2年、菊池氏家臣団84名は連署をもって「政隆は将の器にあらず」とその地位を剥奪し、阿蘇家大宮司の惟長を迎え入れました。惟長は菊池武経と改名して肥後守護の座を継ぎました。追われた政隆は内空閑、相良氏を頼り更に筑後で菊池復帰の機会を伺っていましたが、4年後の同6年(1509)豊後大友氏の支援を受けた武経と臼間野(南関町)で合戦し、敗れて捕らわれの身となり、久米道を阿蘇氏の本拠地矢部浜町に護送されることとなりました。そこを菊池の旧臣玉屋三郎貞親が与力の兵200を率いて田島陣塚で待ち伏せ、護送団一行を襲って政隆奪還に成功し久米安国寺に入ります。これを知った武経は兵500を率い反撃し、両者は久米原で激突するも、再び敗れた政隆は安国寺に入り自刃して果てまし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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