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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国語)菊池武重の墓

2025年03月05日

기쿠치 다케시게의 묘 

 기쿠치 다케시게(1307-1341)는 기쿠치 가문 역사의 중요한 국면에 영주가 되어 일족 최대의 번영을 위한 기초를 쌓았습니다.


 1333년, 다케시게는 극적인 상황 속에서 영주가 되었습니다. 수 세기에 걸친 무가의 지배 이후 조정과 무가가 주도하는 가마쿠라 막부 사이에 내란이 발발했고, 기쿠치 가문은 조정 측을 따랐습니다. 규슈에서 막부에 타격을 주려고 했던 다케시게의 아버지, 다케토키(1292-1333)는 현지에 있는 무사단의 동맹을 결성하여 하카타(현재 후쿠오카현 후쿠오카시)에서 막부의 지부를 공격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두 진영이 격돌하려던 그때, 동맹을 맺었던 무장 여러 명이 기쿠치 가문을 배신했습니다.

 대군을 이끄는 적에 비해 아군이 적어 죽을 위기에 처한 다케토키는 공격을 속행하기로 했지만, 자신을 대신해 일족을 부흥시키기 위해 아들을 고향으로 되돌려 보냈습니다. 가마쿠라 막부는 불과 몇 개월 후에 붕괴하였고, 승리한 고다이고 천황(1288-1339)은 다케토키의 용기와 충성심을 인정하여 아들인 다케시게를 히고국(현재 구마모토현) 수호(지역의 치안을 유지하는 지방관. 현재 현의 지사와 같은 것)로 임명했습니다.


 천황을 지키기 위해 교토에 머무는 동안, 다케시게는 기쿠치 가문 관련 중요 사항을 합의를 통해 결정하는 등 영지 내 개혁을 일으키는 정책을 도입했습니다. 해당 정책은 일족의 결속력을 강화했습니다. 한편 다케시게는 일족의 전술을 창으로 무장한 무사를 밀집시켜 공격하게 하는 방법으로 변경했고, 기쿠치 가문은 조정의 적과 전투해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기쿠치 가문이 새로운 무가 정권인 아시카가 막부의 지배에 어쩔 수 없이 복종하게 된 직후, 다케시게는 34세의 나이에 병으로 사망했습니다. 하지만 다케시게의 시대에 시행된 개혁 덕택에 이후 동생인 다케미쓰(1319-1373)가 일족을 규슈에서 가장 강력한 무사단으로 바꾸었습니다.

 

 1816년에 재건된 다케시게의 묘는 도후쿠지 절이 있는 언덕과 기쿠치 강 사이에 있는 논으로 둘러싸인, 작은 나무숲 안에 있습니다. 묘비의 받침대는 중국 신화에서 상서롭다고 여겨진 거북이와 뱀의 특징을 조합한 생물의 형태입니다.


기쿠치 일족(菊池一族とは)

다른 문화재에 설명판도 다국어화 되어 있습니다.(他の文化財説明板も多言語化しています。)


菊池武重の墓

 菊池武重は12代武時の嫡子で、元弘3年(1333)、父と共に博多の九州探題北条英時の館に討ち入る際、武時は武重に故郷に帰り、菊池家を再興するように命じました。これが、「袖ヶ浦の別れ」と呼ばれるエピソードです。

 父の死により13代惣領となった武重は、寺尾野城で旗揚げし菊池氏の巻き返しに尽力しました。京都から刀工一族(延寿派)を招き、以降の戦術に大きな影響を与えることとなる「菊池千本槍」を考案し、箱根竹ノ下の戦いで勝利し、また菊池家憲「よりあひしゅうのないたんの事」を制定して一族の団結を図りました。

 墓は輪足山東福寺の歓喜院跡にあり、15代武光の墓を模して文化13年(1816)に造られまし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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