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쿠치 다메쿠니·시게토모의 묘
교쿠쇼지 절의 묘지에 있는 기쿠치 다메쿠니(1430-1488)와 아들 시게토모(1449-1493)의 묘는 기쿠치 가문이 정치적인 목적에서 문화의 진흥으로, 방향성을 성공적으로 전환한 시대의 흔적입니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 다메쿠니가 15세에 영주가 됐을 때, 기쿠치 가문이 전장에서 누렸던 영광의 날들은 이미 끝을 맞이했고, 남은 영토를 유지하는 것조차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다메쿠니는 일족의 힘을 지방 문화를 지원하는 데 쏟았습니다. 무사나 주민에게 교육을 시행하고, 그들이 지적·정신적인 부분을 탐구하도록 장려했습니다.
36세에 다메쿠니는 시게토모에게 지위를 물려주고, 영주의 자리에서 물러났습니다. 그리고 당시 일본의 선학자들 사이에서 특히 큰 영향력을 지니고 있던 중국 선종의 어록 『벽암록』의 연구에 전념했습니다. 또한 교쿠쇼지 절을 자신의 보다이지(선조 대대의 위패를 모신 절)로서 설립했습니다.
시게토모는 아버지의 문화 육성을 위한 노력을 이어 나갔고, 시게토모의 지도하에 기쿠치는 불교와 유교 학문의 중심지가 되었으며, 차 문화도 번성했습니다. 시게토모는 공자를 모시는 사당을 세우고 공자와 그 제자들의 조각상을 안치하도록 명했습니다. 이 사당을 중심으로 학문의 중심지가 형성되었고, 멀리 있는 교토에서 학자들이 기쿠치에 모여 철학이나 종교에 관해 토론을 펼쳤습니다.
※기쿠치 일족(菊池一族とは)
※다른 문화재에 설명판도 다국어화 되어 있습니다.(他の文化財説明板も多言語化しています。)
菊池為邦・重朝の墓
20代為邦は肥後・筑後の両守護を兼ねており、武芸に優れる反面、儒学や禅を修め、文芸にも秀でていました。37歳の若さで家督を重朝に譲り、隠居して館を寺とし碧厳寺と称しました。21代重朝は為邦の長男で、文正元年(1466)に肥後守となりました。続く戦乱の中で孔子を祀る聖堂を建て、家臣に学問を奨め、儒学を広め、一日一万句を詠む連歌の会を催し、文教の祖と仰がれています。
二人の墓は20代為邦が享徳元年(1452)に菩提寺として建立したといわれる玉祥寺に所在しま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