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쿠치 다케미쓰의 묘
기쿠치 다케미쓰(1319-1373)는 기쿠치 가문의 15대 영주이며, 일족 가운데 전쟁에서 가장 공을 많이 세웠다고도 알려져 있습니다. 기쿠치 가문 일족이 지방의 무사단에서 시작하여 규슈의 가장 강력한 정치 세력으로 발전한 계기가 된 영향력이 있는 개혁자입니다.
고난의 시작
다케미쓰가 14세일 때 고다이고 천황(1288-1339)의 전우였던 아버지, 12대 영주 다케토키(1292-1333)가 하카타(현재 후쿠오카현 후쿠오카시)에서 당시 일본을 지배하던 무사 정권인 가마쿠라 막부의 지부를 공격했으나, 실패했고 전사했습니다. 가마쿠라 막부는 불과 몇 개월 후에 무너졌고, 조정과 무사들이 지배 세력의 지지자가 국가의 지배권을 둘러싸고 싸우는 불안정한 시대가 시작된 것입니다.
이러한 권력 투쟁의 결과, 1336년에 조정은 2개로 분열되었습니다. 기쿠치 가문은 고다이고 천황에게 충성을 맹세하였고, 고다이고 천황이 이끄는 남조는 무사들이 지지하는 북조에 대항하였으나, 북조군과의 몇 차례에 걸친 전투에서 패했습니다. 다케미쓰의 두 형이 아버지의 뒤를 이어 기쿠치 가문을 이끌었지만 한 명은 요절하였고, 다른 한 명은 사직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1344년에 다케미쓰가 일족을 이끄는 차례가 됐을 때는 기쿠치 가문의 세력이 약해졌고, 적들에게 포위된 상태였습니다.
다케미쓰의 대두
다케미쓰는 기쿠치 가문을 새로운 시대로 이끌려고 했습니다. 일족의 중심지였던 성을 중심으로 형성된 도시인 와이후(현재 기쿠치시 중심부)를 중심으로 행정 개혁을 시행하여 기쿠치 세력의 기반을 공고히 했습니다. 다케미쓰가 펼친 정책 중 하나로 와이후에 있는 선종 사원 5곳을 특별 보호 하에 두는 기쿠치고잔 제도를 만들었습니다. 그 보답으로 해당 사원은 다양한 행정, 감독, 종교적 임무를 수행해 기쿠치 가문을 섬겼습니다.
정치면에서 다케미쓰는 고다이고 천황의 황태자였던 가네나가 친왕(懐良, ‘가네요시’ 라고도 함, 1329-1383)과 손을 잡았습니다. 가네나가 친왕은 남조 및 현지 무사단과의 동맹을 구축하기 위해 규슈에 파견된 상태였습니다. 조정의 지원으로 다케미쓰는 일족의 영토와 영향력을 확대하였고, 기쿠치 가문의 영주가 된, 약 15년 후에는 규슈 각지의 무사단으로 강력한 연합군을 결성했습니다.
정복과 붕괴
1359년, 다케미쓰와 가네나가 친왕이 이끌던 무사 약 4만 명이 현재 구루메시 근교의 지쿠고 강 전투에서 북조군 약 6만 명을 무찔렀습니다. 이 결정적인 승리로 기쿠치 동맹은 규슈 전역을 지배하게 되었고, 다케미쓰는 규슈에서 당시 가장 큰 권력을 가진 인물이 되었습니다.
이 전투에서 승리한 후에 몇 년간 기쿠치 가문은 진지를 강화하려고 했지만, 남조 측에서 승리한 규슈의 무사들에게 (나라와 가까운) 요시노의 천황을 방문하라는 요청이 있었고, 이는 재앙을 불러일으키게 됩니다. 다케미쓰가 지휘하는 함대는 규슈에서 출항했지만, 북조군에게 공격을 당해 패주했습니다. 또한 북조는 규슈의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 뛰어난 참모로 유명한 새로운 장군 이마가와 료슌(1326-1420)을 파견했습니다.
료슌은 1372년에 기쿠치군을 하카타 주변에서 추방했고, 다케미쓰는 더욱 남쪽에서 군을 재편성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1373년, 기쿠치 세력이 이전에 승리를 거둔 지쿠고 강 주변에서 진지를 강화하고 있을 때, 다케미쓰는 갑작스럽게 원인을 알 수 없는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최강의 장군을 잃은 가네나가 친왕이 이끄는 남조군은 적의 공격으로 규슈의 후미진 곳까지 몰렸습니다. 1383년에 가네나가가 사망하자 이러한 저항은 끝을 맞이했고, 기쿠치 가문의 세력은 다시 선조의 땅인 와이후 주변에 틀어박히게 되었습니다.
다케미쓰의 묘
기쿠치 다케미쓰는 영주가 된 후 창건한 쇼칸지 절에 모셔졌습니다. 묘 위에 우뚝 솟은 거대한 녹나무는 다케미쓰의 장례식 때 심어졌다고 전해집니다. 현재 묘비는 1779년에 와이후의 유지가 세운 것으로, 거북이와 뱀을 조합한 중국의 신화 속 생물의 형태를 한 독특한 받침대 위에 세워져 있습니다. 이는 1700년대 일본 상급 무사들 사이에서 널리 퍼진 양식입니다.
※기쿠치 일족(菊池一族とは)
※다른 문화재에 설명판도 다국어화 되어 있습니다.(他の文化財説明板も多言語化しています。)
菊池武光の墓
武光は13代武重の弟で、14代武士が合志幸隆に奪われた菊之城を奪還して15代惣領となりました。大方元恢和尚を招いて熊耳山正観寺を建立し菊池五山を定めるなど内政を固める一方で、征西将軍として赴任した後醍醐天皇の皇子懐良親王を菊池に迎え、親王が開いた隈府征西府を支えて南朝方の版図拡大に尽力しました。その生涯は戦いに明け暮れ、百戦百勝の名将と称えられます。
武光が関わったなかで最も有名な戦いは大原の戦い(大保原の戦い・筑後川の戦い)で、関ヶ原、川中島と並び日本3大合戦に数えられています。
もとは樟の巨木が墓神木とされ、別の墓標があったようですが、渋江紫陽、松石父子や隈府の豪商である宗伝次らの尽力により、湊川神社にある楠正成の墓を模して安永8年(1779)に現在の墓が建てられまし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