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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기쿠치 노리타카(菊池則隆 : 출생 연도 미상~1081년)
1070년, 다자이후 덴만구의 장원(荘園)인 아카호시소(赤星荘) 장원 영주(荘官)로 기쿠치에 부임했다. 후카가와(深川)에 저택을 짓고, 아들인 마사타카(政隆)를 시치조 사이고(西郷), 야스타카(保隆)는 가모토 분다(分田)에 배치해, 기쿠치가와 강 유역 지배를 위한 기초를 쌓았다. 후카가와의 사호가와하치만구(佐保川八幡宮) 신사와 오토도(神来)의 기부네 신사(貴船神社) 외, 교쿠시 벤리 이와모토(岩本)에 있는 엔쓰지(円通寺) 절 등, 유역의 사원 신사 권청(勧請)도 많이 했다.
이전에는 혈통이 후지와라(藤原) 씨 가계라고 했으나, 근년에는 현지의 토호(유력자)가 다자이후 장관직에 있는 후지와라 씨를 섬김으로 그 성을 하사 받았다는 견해가 연구상 일반적이다. 기쿠치란 성도 이전부터 자칭했었다고 생각된다.
묘소는 기쿠치시 후카가와(深川). 1818년에 만들었다. 무덤 아래에는 고분의 거석이 있다고 하며, 메이지 3년인 1870년에 세운 기쿠치 신사 경내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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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대 기쿠치 쓰네타카(菊池経隆 : 출생과 사망 연도 미상)
노리타카(則隆)의 아들로, 효도케이고타로(兵藤警護太郎)라고도 했다. 1087~1090년, 가에(加恵)지역에 스와구(諏訪宮) 신사와 하치만 신을 모신 신사(八幡宮)를 권청(勧請)했다.
묘소는 이데타(出田)의 와카미야 신사(若宮神社)라고 하지만, 묘비 등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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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대 기쿠치 쓰네요리(菊池経頼 : 출생과 사망 연도 미상)
쓰네타카(経隆)의 아들로, 효도시로(兵藤四郎)라고도 했다. 지쿠호(筑豊) 지역에 진출해 광대한 영지를 소유했다고 하며, 후에 그 영지를 도바원(鳥羽院) 천황에 기부했다.
묘소는 불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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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대 기쿠치 요시타카(菊池能隆)
다카사다(隆定)의 적자인 다카쓰구(隆継)가 요절했으므로, 그 아들인 요시타카(能隆)가 8대 계승자가 되었다. 이 시대에는 요시타카의 삼촌 2명(이에타카:家隆와 다카모토:隆元?)이 교토 오반야쿠(京都大番役)로 상경해 있었다.
1221년에 일어난 조큐의 난(承久の乱)에서는, 고토바(後鳥羽) 상황(上皇) 측에 서서 바쿠후(호조 씨: 北条氏)와 싸웠으나 패했다.
요시타카의 자녀에는 9대 다카야스(隆泰) 외, 사이고 가문(西郷家)에 들어가 몽골 침입 때 활약한 다카마사(隆政), 18 외성(外城)의 하나인 쇼코지 성(正光寺城) 성주가 된 가에 구로타카토키(加恵九郎隆時) 등이 있다.
묘소는 불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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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대 기쿠치 다케후사
다카야스(隆泰)의 차남으로, 기쿠치 지로(菊池次郎)로 불렸다. 또한, 장남은 도호쿠지절(東福寺) 주지가 되었다.
동생(아카호시: 赤星) 아리타카(有隆), 삼촌 사이고 다카마사(西郷隆政) 등과 함께 분에이 난(文永の役, 1274년), 고안의 난(弘安の役, 1281년)의 2차례에 걸친 몽골 침입 때 크게 활약했으며, 이 사실은 다케자키 스에나가(竹崎季長)에 의한 "몽골 침입 그림 두루마리"에도 기술되어 있다.
그러나 그 활약과 희생에 대한 바쿠후의 은상이 갑옷 한 벌로 매우 적어, 다케후사 대에도 바쿠후에 대항하는 쪽이 되어 간다. 침략에 대항해 활약했으나 은상으로서 토지가 없음에 따른 것으로, 많은 고케닌(御家人)이 바쿠후에 불만을 품게 된다. 다케후사의 경우는 바쿠후 내의 세력 다툼에서 시모쓰키 소동(霜月騒動)으로 유배된 측과 관계가 깊었던 것도 원인의 하나로 여겨진다.
기쿠치 신사 경내에 있는 시로야마 신사(城山神社)의 주제신(主祭神)으로 모셔졌다.
묘소는 불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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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대 기쿠치 다케미쓰
다케시게(武重)의 남동생으로, 원래는 도요타 주로(豊田十郎)라고 했다. 현재의 구마모토시 조난마치(城南町) 부근에 거처가 있었으나, 14대 다케히토(武士)가 뺏긴 기쿠노조(菊之城)를 탈환하고 가독을 승계하였다.
이후, 아소 일족의 서가(庶家) 에라 고레즈미(恵良惟澄)와 협력하며, 1348년 기쿠치에 가네나가 친왕(懐良親王)을 맞이하고 형 다케즈미(武澄)와 결속하여 친왕을 지지한다. 규슈 단다이(九州探題)의 잇시키 노리우지(一色範氏)와 세력을 다투다, 1359년 오하루 전투(오호바루 전투, 지쿠고가와 전투)에서 승리하여, 1361년 가네나가 친왕은 다자이후(大宰府)에 세이세이후(征西府)를 두고 기쿠치 일족의 역사는 전성기를 맞는다.
그러나 1368년 상경(東上: 교토에 진출하는 것) 계획 실패를 계기로 점차 기쿠치 일족과 남조 세력은 쇠퇴하게 된다.
1372년 다자이후를 빼앗기며 이때 전투에서 입은 상처로 이듬해(1373년) 사망함
다케미쓰는 소데가우라(袖ヶ浦)의 이별에도 동석했고, 기쿠치로 돌아갈 때 숨겨준 하카타의 임제종(臨済宗) 쇼후쿠지절(聖福寺) 다이호 겐카이(大方元恢) 스님을 기쿠치에 불러, 유지산(熊耳山) 쇼칸지절(正観寺)을 열었다. 아울러 가네나가 친왕의 명으로 기쿠치 오산(菊池五山: 도후쿠지절, 니시후쿠지절, 난푸쿠지절, 훗푸쿠지절, 다이린지절)을 열었다.
묘소는 쇼칸지절 경내에 있으며, 큰 녹나무(쇼칸지절 녹나무: 구마모토현의 천연기념물)를 묘목으로, 1779년 시부에 시요(渋江 紫陽), 쇼세키(松石) 부자와 소 다다쓰구(宗伝次)등이 귀부(亀趺) 묘소를 세웠다.
기쿠치 신사 주제신(主祭神)의 하나로 모시고 있다.
다케미쓰의 묘. 효고현 미나토가와 신사(湊川神社)에 있는 구스노키 마사시게(楠木 正成)의 무덤(미토 미쓰쿠니 건립)을 본뜬 것으로 알려졌는데, 외형은 다르다. 남조 공신 묘비에 귀부(亀趺)를 사용한다는 생각을 본뜬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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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대 기쿠치 다케토모(菊池武朝: 1363년~1407년)
다케마사(武政)의 장자로, 아명은 가가마루(賀ヶ丸). 1374년 다케마사의 사망으로 12세의 나이로 가독을 계승하고 가네나가 친왕의 조카 요시나리 친왕을 새로운 세이세이 쇼군으로 맞이한다.
1375년, 기쿠치 18 외성의 하나인 우테나 성(台城)에서 미즈시마(水島) 전투를 비롯한 다쿠마하라(託磨原) 전투 등 요시나리 친왕을 받들며 남조 세력의 반전을 꾀하지만, 규슈 단다이 이마가와 료슌 앞에 모리야마 성도 빼앗긴다. 1392년 남북조가 합일되기 조금 전, 남조측 내부에서 불화가 생겼을 때, 기쿠치 가문의 정당성을 호소하며 다케토모가 남조 조정에 제출한 것이 "기쿠치 다케토모 탄원서"이다. 이 "탄원서"에 기쿠치 가문이 후지와라 (藤原) 씨의 혈통인 것으로 기술되어 있다.
남북조 합일 후에도 히고에서 기쿠치 일족의 중요성을 인정받아 다케토모(武朝)는 히고 수호에 임명되었다.
시게미(重味)의 신토쿠지 절(真徳寺)터에 귀부(亀趺) 묘소가 있고, 히에가타(稗方)에도 묘비가 세워져 있다.
기쿠치시 시게미(重味)의 신토쿠지 절터에 있는 다케토모(武朝) 무덤. 귀부 묘소이다. 신토쿠지 절은 다케토모 선조 대대의 위패를 모신 보리사(菩提寺)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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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대 기쿠치 모치토모(菊池 持朝: 1409년~1446년)
가네토모(兼朝)의 적자로, 바쿠후로부터 지쿠고 수호(筑後 守護)에 임명되어 세력 회복에 노력했지만, 일족 내의 분쟁 등도 있어 성과 없이 사망함.
묘소는 가타가쿠(片角)의 고젠지 절(光善寺)에 있음.
기쿠치시 가타가쿠(片角), 고젠지 절(光善寺)에 있는 모치토모의 무덤.